"원씨야. 나 좀 도와줘"
"저한테 가져갈 것이 있으면 다 가져가세요"
방금 래현바람돌이형한테 온 문자. 얼른 머리감고 가서 같이 끄적여야겄다. 래현바람돌이형 아니었음, 아마 삼십분은 끄적거렸을 듯.
1. 6시 50분 기상
2. 7시 15분 하나스퀘어 열람실 도착, 자리 선정 뒤 간단한 아침 식사
3. 8시 의사 선생님께서 금요일 면접을 위해 특별 제조해 주신 강력한 약 섭취
4. 8시 15분 월요일에 있을 교양과목 공부 시작. 1장 부터 차례차례
5. 9시 약발 발동 어지러움증과 울렁증, 졸음이 한꺼번에 밀려옴
6. 10시 20분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림. 자리를 연장하고 난 뒤 자리에 앉았으나 어지러움이 가시질 않음
7. 10시 30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몽롱함에 방으로 들어와 편하게 잠을 청함
8. 2시 사이 가위 눌림
9. 2시 기상 몸이 허해짐을 느끼고 뼈다귀 해장국 한사발을 들이키고 열람실로 향함
10. 2시 반 부터 6시까지 교양과목 1장부터 2장을 팜
11. 6시 부터 7시 10분 돈가스로 저녁 식사를 맛나게 하고 졸음 방지를 위해 커피를 마심
12. 7시 20분 이제 3장과 4장 스타트. 책을 읽고 밑줄을 긋고 노트에 정리함
13. 10시 상곤이가 프린트를 복사해야 한다며 찾아옴
14. 10시 5분 상곤왈 "시험 범위가 5장만이래. 다른거 할 필요 없어"
15. 10시 6분 정신 혼미
16. 11시 20분 혼미한 상태에서 대충 5장을 보다 짐을 싸서 들어옴
분명 아침 일찍 일어나 많은 양의 책을 읽은 것 같았는데, 결국 내가 오늘 정말 해야 할 일을 한 것은 달랑 한 시간. 밤새 술마시고 아침에 잠이들어 지금 일어난 기분이다. 결국 마인드 컨트롤에 실패하고 방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일찍 자고, 내일부터 시작될 새로운 삶을 향해... 니미...
중간고사 기간이 끝나간다. 공대생이야 시험 기간에 대한 정해진 스케쥴이 없기 때문에 별반 상관이 없다 하지만 다음주 부터 펼쳐질 화려한 대동제를 앞두고 과도관은 지금 폭풍전야처럼 신비스런(?) 분위기다.
시험 기간의 특징이 몇 가지 있는데 평소에는 시원찮던 갖은 일들이 희한하게 '즐겁게' 다가 온다는 것이다. 시험이 다가 올 수록 별반 재밌지 않았던 친구와의 농담 따먹기도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 컴퓨터라도 옆에 있으면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웹서핑을 두 세시간은 훌쩍 넘기고야 말뿐 아니라 눈 인사만 하고 지나치던 친구를 붙잡고도 한 참을 떠들게 된다. 이 기간의 휴게실은 웃음 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크며 또한 끊이지 않는다. 시험 기간이 되면 '즐길 수 있는' 역치가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에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이다. 갑갑한 시험의 압박 덕분에 인생을 기쁘고 재밌게 살 수 있는 이 '즐길 수 있는' 감각 세포의 역치는 평소보다 절 반 이상 하락한다. 결국 도서관에 의자 빼는 소리에도 '방구 소리'를 운운하며 입을 막고 깔깔 거리고 간혹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장단까지 맞추며 몸을 흔들기도 한다.
'아. 시험 X됐어' 라는 말이 유행처럼 과도관에 울려퍼지고 있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시험 기간에 과도관의 한 쪽 귀퉁이에 앉아 '역치'를 생각하며 깔깔 거리는 나 역시 현재 '즐길 수 있는' 감각세포가 'Valence band'에 갖혀 'Conduction band'로 날아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감각 순응' 현상이 일어나고 결국엔 바닥에 깔렸던 역치 조차 사라져 버릴 지도 모른다. '즐길 수 없는' 감각세포로 무장한 나. 생긴 것도 험학한데 감정까지 메말랐다고 생각하니 가관이다. 이 생각을 하면서도 실없는 사람처럼 나는 또 깔깔 거렸다. 시험아 어서 끝나 주세요.
2007년도 1학기에, 나는 전공 세과목을 신청했다. 나머지는 모두 교양으로 고고싱. 교양 과목 중 두 과목은 레포트로 대체되었고 한 과목은 어렵사리 구한 소스를 통해 달랑 세시간 공부로 99점을 맞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전공과목은 한 마디로 쌌다. 일주일 간격으로 이어지는 시험들과 방대한 분량의 범위. 무엇보다도, 당췌랄리 해석할 수 없는 꼬부랑말로 솰라솰라 거리는 전공서적을 뒤적이며 나중에 "공대 전공서적 번역판 사업" 을 벌여 보는 것은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성공으로 가는 1등 지름길이 아닐듯 싶은데 말이다.
공대 시험의 특징은 간단히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학교에서 정해 준 정식 중간고사 기간이라는 것은 공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 덕분에 공대생들의 외형은 썩어간다는 것이다. 4월 초부터 시작한 1차 시험의 압박과 퀴즈, 그 때 부터 시작되는 한 주 걸러 한 주 시험에 끝이 보일 듯 하니 시작하는 2차 시험과 프로젝트 과제들. 끝나고 약간 쉬려고 하니 시작된 3차 시험과 기말고사. 결국 공부를 진정 하려는 리얼 공대생들은 4월 부터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집과 과도관을 드나들며 책과 씨름을 하게 되고 나같은 날라리 허접 공대생들은 5월 한달 내내 노는 체력을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 그토록 분산됐던 시험이 하루에 세개가 몰리면서, 모든 과목을 GG치고 나오는 새로운 경험을 맛보았다. 이거 기분 X같다.
때문에 공대생들의 옷차림은 언제나 츄리닝과 쓰레빠, 후질그레한 티로 묘사된다. 물론, 개중에는 오지게도 멋진 간지를 풍겨대며 바쁜 시간 쪼개서 멋나게 하고 나오는 친구들도 꽤 있지만 소수일 뿐. 내 경우 심지어 츄리닝 바지를 빨았던 날, 면 바지와 다림질 빳빳히 해 놓았던 남방을 꺼내입고 갔던더니 일제히 물었다. "너 오늘 중요한 약속있냐?"
지나고 나면 웃으며 보낼 지긋지긋했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떠오른다. 이틀간 달랑 두시간을 자며 달렸던 지난 기말고사기간. 가장 어려운 과목 중 하나인 재료열역학. 결국 4문제 중 달랑 1문제를 풀고 나오며 C만 나와도 재수강 안한다, 를 되뇌였는데 문제가 워낙 어려웠는지 C+문을 닫는 기적을 일궈내며 한 시름 놓았던 기억. 오픈 북이라 해서 모든 프린트를 뒤적이며 열심히 나올 것들을 정리해 갔던 전산재료과학은 열심히 달렸던 납땜질에도 불구하고 시험 문제가 '코딩' 이 나오는 바람에 결국 B로 마무리. 전략과목이었던 전자및반도체재료공학은 기말고사 점수에 96점이라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쾌재를 불렀건만 만점이 120점이라는 말에 다시금 OTL모드로. 난생 처음 교수님께 칭찬을 받았던 과목인 경제학 개론은, A+을 예상했지만 A가 나오는 바람에 심심한 상처를 입었고 A+이 나와 주먹을 불끈 지었던 포도주개론은, 바로 다음날 성적이 수정 되면서 B+로 떨어지고 말았다. 니부랄.
다음학기는 어떻게 될까. 재료열역학과 더불어 가장 어려운 과목 중 하나인 상평형론이 날 기다리고 있으며 학점을 끌어 올리기 위한 화학의 재수강. 하지만 3차 시험의 압박. 아직 교수님이 정해지지 않은 반도체공정과 학점을 뿌렸다던 박막재료. 가슴 떨리게 긴장되는 과목 이름들이지만, 여지껏 그렇게 버텨온 것 처럼, 씨발 싸발 갖은 욕을 다 해 가면서 또 다시 한 학기를 흘러 보낼 듯 싶다. 당장은 죽을 것 처럼, 잠을 못자 누렇게 뜬 얼굴과 기름진 머리로 과도관을 누비며 한숨을 푹 내쉴 모습이 안봐도 비디오지만, 그렇게 시험이 끝나고 또 방학이 오면 애들과 낄낄 거리며 '난 너 머리에서 참기름 짜내는 줄 알았어' '야 난 니 얼굴에다 밥 비벼 먹고 싶더라' 라는 껄렁껄렁한 농담으로 회고할 것이다. 그래서, 공대생의 시험 기간도 견딜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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